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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장

이 시국에 즉석 만남이란

광안대교 위에서                -출처: 강일혁

친구들을 만나러 가는 길이었다. 전역한 뒤 컴퓨터를 맞춘 터라 오랜만의 외출이다.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게 있다. 목적지를 향해 운전을 하는 와중에도 늘 새로운 문자 알림이 대시보드에 뜨는 것이다. 

코로나19 관련 안전 안내 문자였다. 안전 안내 문자에선 우리가 안전하지 않은 상황이라고 한다. 

조금만 안일하게 행동해도 나 뿐만 아니라 가족들, 지인들에게도 피해를 주는 상황이 초래될 수도 있다고 한다. 

그러면 안되는 거겠지만 나는 잠시동안 나와 관련없는 일이라고 자위했다. 군대 안에서 지겹도록 교육받은 방지대책과 마스크를 항시 끼는 습관과 손 소독제를 바르는 습관이 나를 지켜줄 것이라고 여겼고 친구들을 만나러 가는 도로 위에서 내려오질 않았다. 평소 사람들을 자주 만나는 걸 선호하는 편도 아니고 달밤에 술잔을 기울이는 것을 사랑하지도 않았기에 오늘쯤은 괜찮을거란 멍청한 생각이 나는 좋았다. 

 

폐지줍는 할머니 (본문과 관련없는 사진)              -출처: 네이버 블로그 '택대리의 이야기' 

올해 초가을, 진료 차 서울에 환자로 등록되어 있는 민간병원을 통원하기 위해 몇일동안 서울로 청원휴가를 나갔던 적이 있다. 서울에도 친구들이 있고 지인들이 있어 당장이라도 만나서 놀고 싶었지만 당장 입고 있는 군복에 대한 책임감 때문인지 쉽사리 부대와의 약속을 깨고 싶진 않았다.

 

그렇게 마스크를 끼고 숙소를 찾아 길을 걷던 중 길가에서 폐지를 정리하는 할머니를 마주했다. 그 장면은 평범한 모습이었고 대수롭지 않게 다가왔다. 그러나 할머니의 얼굴은 평범하지 않았다. 마스크를 쓰고 계시지 않으셨던 것이다. 

코로나 2단계에서 2.5단계로 격상하는 내용에 대한 논의가 한창 극성일 정도로 코로나19가 심각한 세상이었다. 마스크를 쓰지 않았다는 평범하지 않은 사실만으로도 할머니는 억울한 대우를 받게 되실 수도 있었다. 

 

3분 간 고민했다. 여분의 일회용 마스크가 1개 남았던 나는 마스크에 대한 아까운 감정때문이 아니라 마스크를 건네는 나의 모습이 괜한 오지랖이 되는 것은 아닌지, 할머니가 기분 나빠하시는 것은 아닐지 혼란스러웠다. 

고민하면서 뒤로 메고 있던 백팩을 마스크를 꺼내기 위해 앞으로 둘러 멘 나 자신을 인지하고 나서야 정신이 들었다. 

나는 무엇을 고민하고 있던걸까. 단지 개인적인 감정이나 처지가 곤란해지는 것을 두려워서 타인을 도울 수 있는 입장에 서 있는 놈이 무엇을 망설이고 있는걸까. 내가 망설이고 있는 이 순간에도 코로나 바이러스는 할머니에게 침투할 수도 있는 상황이지 않던가. 

 

                        " 할머니, 혹시 괜찮으시다면 이 마스크 끼시겠어요? 저는 하나 더 있어서 괜찮아요."

                               "아이구, 총각! 이게 뭣...아이고 고마버유. 복 받을끼라. 마음이 참말로 곱네"

 

마스크를 받아드시던 할머니의 눈가에 맺힌 미소와 할머니의 진심 어린 칭찬은 아무래도 좋았다. 그러나 마스크를 건네던 그 찰나에 도로 가에 유유히 지나던 시내 버스 안 어떤 여성과 눈이 마주쳤다는 사실이 충격을 주었다. 

만약 내가 부정한 행동을 하고 있었다면 어땠을까? 과연 나의 양심이 그것을 버틸 수나 있었을까? 무척 괴로웠을 것 같다. 

나는 분명 당연한 일을 한 것이다. 누군가와 마주해도 떳떳할 뿐만 아니라 스스로에게도 부끄러움 없는 행동을 한 것이다. 나의 모습을 보았던 그 여성의 시선이 나의 가치관을 확립시켜 주었다.

규칙이나 지침, 법규, 방칙 등 사회에서 개인이 스스로를 제어하여 지켜나가야 할 사항이라는 개념이 23살인 나에겐 아직까지 와닿았던 적이 없었다. 열심히 정해진 것을 지키고 살아가고 있는 와중에 누군가가 마음대로 정해진 선을 왔다갔다 하는 모습을 보면 나는 그 사람의 비양심적인 행동에 박탈감과 회의감부터 느낄 나약한 인간인 것을 잘 아니까. 또 누군가가 법이나 규칙같이 정해져있는 모든 것은 결국 안 걸리면 합법이라는 이상한 합리화를 들이댈 때도 나는 반박할 수가 없었다. 그러는 편이 더 쉽고 빠르게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이라는 걸 잘 아니까. 

그렇게 나는 선과 악에 대한 개념을 떠나서 규칙을 준수해야하는 개인의 양심과 도덕성에 대한 개념을 잘 못 정립하고 있었다. 마땅히 조언해줄 만한 위인을 만나지도 못했었기에 나는 이런 상황에서 혼란을 겪는 것 밖에 할 수 없었다. 

그러나 버스 안 그녀의 시선에서 나는 내면의 변화가 일어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결국 규칙이나 법 등 내가 속한 사회에서는 적어도 '선(善)'이라 분류되는 행위들에 대한 심판은 다름아닌 스스로에게 있는 것이었다. 우리는 이것을 양심이라고 한다. 자신이 선을 따르건 따르지 않건 그것이 들켰다거나 들키지 않았다는 것에 의미를 두지 말고 모든 건 스스로가 지켜보고 있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올해 초가을. 나는 폐지 줍는 할머니와 버스 안에 있던 여성에게 영향을 받아 양심의 기준을 어디에 두어야 할 지 깨달았다. 

 

예쁜 아파트                 -출처: 강일혁

다시 오늘로 돌아와서, 나는 지금 이 시국에 친구들에게로 달려가고 있는 것이 과연 옳은 선택인지 아닌지에 대해서 성찰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정작 내가 성찰해야 하는 것은 따로 있었다. 

 

' 행위에 대한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것은 표면적일 뿐, 결국은 그 행위를 어떻게 생각하고 왜 합리성을 갖게 되었는지를 생각하고 판단해야한다' . 

 

나는 코로나19 로 인해 친구들에게 달려가고 있는  자신의 행위를 자책할 필요는 없다. 그 행위 자체는 자신과 남에게 피해를 끼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내가 코로나19 확진자라면 얘기가 다르겠지만) 나는 내 행동에 합리성을 추구하는 방향을 잘못 짚었던 것이다. 코로나19 바이러스가 나와는 상관 없을 거라는 안일함과 교육받은 예방 수칙만 준수하면 아무 일도 없을 거라는 멍청한 생각이 나의 행동을 합리화하고 있다는 사실이 잘못 되었다. 

 만약 정말로 이렇게만 생각하고 멈춰버리는 놈이라면 나는 할머니에게 마스크를 나누어드리지 않았을 것이다. 버스 안에서 느껴지는 시선을 따라 올라가 그녀의 눈과 마주쳤으면 안되었을 것이다. 

 

나는 단단히 잘못 생각하고 있던 것이다. 과거의 혼돈과 친구였던 그 습관을 버리지 못한 채. 

 

친구들을 즉석으로 만나러 가는 것은 문제 없다. 하지만  그 행동의 결과에 대해선 스스로 책임져야만 한다. 그 책임은 멀거나 어려운 개념이 아니다. 만약 내가 가는 가게가 코로나19 바이러스 관련 예방수칙을 수행하지 않는 곳이라면 직원이나 사장님에게 분명한 의사를 전달해야 하고 개인 예방 수칙은 철저히 지키면서 잠깐의 자유를 보장받고자 스스로의 의무를 철저히 수행해야한다. 만약 그렇게 해서도 코로나19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확진자가 되었다면 나는 오늘 일에 대한 책임을 끝까지 져야 한다. 보건소에 감염증상과 감염경로가 일치하는 내용을 보고하고 검사와 치료를 위해 스스로의 시간과 자유를 반납해야만 한다. 적극적으로 검사와 치료에 임해야 한다.

 

나는 오늘도 혼란스러웠고 그 혼란스러움을 똑바로 직시하지 않았기에 하마터면 잘못된 사고방식을 따라갈 뻔 했다. 

눈 앞에 보이는 광안대교와 저 멀리서 빛내고 있는 예쁜 아파트를 보면 앞으로 나의 미성숙함에 직면했을 때 어떤 자세로 나를 쌓아나가야 하는지를 알 수 있었다. 

 

어떤 형태로, 어떤 목적으로 지어진 건물이든 기초가 튼튼해야만 높게 쌓아 올릴 수 있고 파격적인 디자인을 견뎌낼 수 있다고 한다. 나 또한 광안대교나 저기 저 예쁜 아파트와 똑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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